


<멜팅 아이스크림> 홍진훤│2021│다큐멘터리│70분 |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 홍진훤 | 2026 | 다큐멘터리 | 22분 |

소용돌이 속에서
글. 유운성
문득 내 기억에 공백이 있음을 깨닫고 가볍게 소스라칠 때가 있다. 홍진훤의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를 다시 감상하면서 적이 놀랐다. 이렇게나 소란스러운 작품이었나? 이토록 또렷한 드럼 소리가 전시장에서 처음 접했을 때는 어째서 들리지 않았던 걸까? 여느 사람보다 훨씬 둔하기 짝이 없는 내 청각의 탓으로 돌리기엔 이건 워낙 노골적으로 귀에 육박해 들어오는 소리이지 않은가? 당황한 나는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감상했다. 그리고 다시 감상했다. 이러고 나니, 이 무감각을 나의 악화된 기억력이나 전시장 사운드 설비의 탓으로 돌리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을 전시장에서 처음 접했을 때 분명 나는 대단히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의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화면에 떠오르는 사진과 비디오 이미지들, 그리고 (사람들의 말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사하거나 번역한) 자막 텍스트에 쏠려 있었던 것 같다. 즉, 지나치게 시각적인 주의집중이 청각적인 주의산만을 유발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을 처음 대하는 이라면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를,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가늠하느라 고도의 긴장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분명 그러했다. 1992년에 벌어진 윤금이 씨 피살사건과 그의 참혹한 시신 사진이 유포되면서 벌어진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 작품을 본다면 어떨까? 역사적 맥락을 모르는 관람자의 경우, 긴장의 강도는 더 치솟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긴장 속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의, 혹은 텍스트와 사운드의 관계까지 고려한다는 건 너무나도 힘든 과제가 아닐까? 나는 이 영화가 보는 이를 이처럼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는 사진에 관한 영화다. 영화가 사진에 접근하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고다르와 고랭처럼 사진이 특정한 방식으로 기능하게 하는 다양한 배치의 양식을 파헤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의 하룬 파로키처럼 촬영 당시에는 분명치 않았던 사진의 잠재적 의미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몽타주는 중요한 영화적 수단이지만, 전자가 이미지들의 ‘관계’에 좀 더 집중한다면 후자는 이미지들의 ‘세부’에 좀 더 집중하는 편이라고 도식화할 수는 있겠다.
그렇다면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어느 쪽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홍진훤은 탐문의 대상이 되는 사건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이 있으면 그것을 일부러 배제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의 관심은 그런 상징적 사진이 없는 사건들로 향한다. 따라서 관계의 장에 두거나 세부를 살펴볼 대상으로서 핵심적 사진이 정작 작품 내에는 부재하게 된다. 왜 굳이 이런 조건을 두는가? 어떤 현실적 사건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의 배제 또는 부재를 조건으로 해서만 출현할 수 있는 영화적 사건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그냥 출현할 리 없다. 여기서 홍진훤은 역사적 상징의 자리에 놓이지 못했던 온갖 이미지와 증언의 말들과 외침의 말들이 범람케 하고 일대 소란을 일으키며 사건의 강신술을 펼친다. 이는 관계를 만들고 세부를 탐색하는 분석적 몽타주와는 전연 다른 퍼포먼스적 몽타주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사건의 출현을 보았습니까?
하지만 그가 발견의 임무를 관객에게만 돌리는 무책임한 작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이 강신술에서는 크게 네 개의 사건적 계열이 교차한다. (복수의 계열을 교차하는 방식은 홍진훤의 장편 <멜팅 아이스크림>과 <오, 발렌타인>에서도 뚜렷하다.) 각각의 계열이 다루는 사건이 사진과 맺는 관계에 따라 우리는 상징적 사진이 존재하는 사건의 계열과 그런 사진이 존재하지 않는 사건의 계열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주도한 농업안정국(FSA)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도로시아 랭이 1936년에 촬영한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 <이민자 어머니>를 둘러싼 논란, 그리고 2002년에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했을 때 집회 현장에 다시 등장한 윤금이 씨의 시신 사진에 대한 논란은 전자의 계열에 속한다. 이 경우, 논란의 중심에 놓인 사진은 정작 화면에서 볼 수 없다. 물론, 질 J. 울망이 말했듯 이미지는 없앤다 해도 항상 무언가가 남는 법이다. 대신 우리는 FSA 사진가들이 촬영했으나 최종적으로 승인되지 않고 폐기되었던 숱한 ‘펀치 사진’들, 이 사진의 모델이 되었던 플로렌스 톰슨과의 인터뷰, 시신 사진의 전시를 둘러싼 실랑이를 기록한 비디오 영상 등을 접하게 된다. 상징적 사진에서 풀려나 얼마간 익명성을 띠게 된 이 자료들은 풍동에서 벌어진 재개발 반대 투쟁, 그리고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이주 노동자들의 투쟁과 관련된 기록 영상 등 후자의 계열을 이루는 자료들과 뒤섞이며 소용돌이친다.
그 소용돌이 가운데 무엇이 출현하는가? 내가 떠올리는 것 중 하나는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한 불확정적인 비디오 이미지다. 사운드트랙에서는 “이 녹음은 도로시아 랭과 뉴욕에서 진행된 1964년 5월 22일의 인터뷰입니다.”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때 화면에 보이는 것은 어느 가난한 집 부엌에서 민소매 셔츠를 입은 남자가 오른편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의 얼굴은 식별되지 않는다. 을씨년스러운 주방에 그나마 놓인 사물들의 ‘한국적’ 생김새로 봐선 여긴 뉴욕일 리 없고 인터뷰 현장도 아니다. 이 부분 바로 직전에 나왔던 세 장의 흑백사진 중 하나(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는 FSA 펀치 사진)에는 어느 오두막에서 식기를 닦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는데 이 비디오 이미지와 느슨하게 연결되는 것도 같다. 이것은 흑백사진들보다도 전에 나왔던, 명동성당에서 투쟁 중인 이주 노동자들을 찍은 비디오 이미지와 관련된 것일까? 그들 중 누군가의 집에서 찍은 것일까? 아니면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재개발 반대 투쟁의 현장 어딘가에서 기록된 것일까? 아니면 어떤 사건적 계열과도 무관한 것일까?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를 아무리 거듭해서 보아도 이 불확정성은 조금도 해명되지 않았다. 그저 어린 시절의 내가 아침저녁으로 보았던 어떤 풍경과 무척 닮았다는 점만 어느 순간 깨달았을 뿐이다. 여기서 영화의 다른 부분은 물론이고 그 바깥으로 한없이 연결될 것만 같은 잠재적인 이미지 하나가 출현한다. 영화적 사건은 이처럼 흐릿하고 희박하기에 고도의 긴장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들리고 있던 드럼 소리는 이 사건의 출현을 예비하는 것이었나 보다.
글쓴이. 유운성
영화 평론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2016년 영상 전문지 『오큘로』를 창간해 현재까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유령과 파수꾼들』(2018),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2021), 『식물성의 유혹』(2023), 『물듦』(2025)이 있고,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2023)를 번역했다. 2025년 제4회 정점식미술이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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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팅 아이스크림>
홍진훤│2021│다큐멘터리│70분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
홍진훤 | 2026 | 다큐멘터리 | 22분
소용돌이 속에서
글. 유운성
문득 내 기억에 공백이 있음을 깨닫고 가볍게 소스라칠 때가 있다. 홍진훤의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를 다시 감상하면서 적이 놀랐다. 이렇게나 소란스러운 작품이었나? 이토록 또렷한 드럼 소리가 전시장에서 처음 접했을 때는 어째서 들리지 않았던 걸까? 여느 사람보다 훨씬 둔하기 짝이 없는 내 청각의 탓으로 돌리기엔 이건 워낙 노골적으로 귀에 육박해 들어오는 소리이지 않은가? 당황한 나는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감상했다. 그리고 다시 감상했다. 이러고 나니, 이 무감각을 나의 악화된 기억력이나 전시장 사운드 설비의 탓으로 돌리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을 전시장에서 처음 접했을 때 분명 나는 대단히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의의 방향은 어디까지나 화면에 떠오르는 사진과 비디오 이미지들, 그리고 (사람들의 말 자체보다는 그것을 전사하거나 번역한) 자막 텍스트에 쏠려 있었던 것 같다. 즉, 지나치게 시각적인 주의집중이 청각적인 주의산만을 유발한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작품을 처음 대하는 이라면 이미지와 이미지의 관계를,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를 가늠하느라 고도의 긴장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분명 그러했다. 1992년에 벌어진 윤금이 씨 피살사건과 그의 참혹한 시신 사진이 유포되면서 벌어진 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이 작품을 본다면 어떨까? 역사적 맥락을 모르는 관람자의 경우, 긴장의 강도는 더 치솟을 것이 분명하다. 이 긴장 속에서 이미지와 사운드의, 혹은 텍스트와 사운드의 관계까지 고려한다는 건 너무나도 힘든 과제가 아닐까? 나는 이 영화가 보는 이를 이처럼 긴장 상태로 몰아넣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는 사진에 관한 영화다. 영화가 사진에 접근하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제인에게 보내는 편지>의 고다르와 고랭처럼 사진이 특정한 방식으로 기능하게 하는 다양한 배치의 양식을 파헤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의 하룬 파로키처럼 촬영 당시에는 분명치 않았던 사진의 잠재적 의미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양쪽 모두에게 몽타주는 중요한 영화적 수단이지만, 전자가 이미지들의 ‘관계’에 좀 더 집중한다면 후자는 이미지들의 ‘세부’에 좀 더 집중하는 편이라고 도식화할 수는 있겠다.
그렇다면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어느 쪽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홍진훤은 탐문의 대상이 되는 사건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이 있으면 그것을 일부러 배제하기 때문이다. 혹은, 그의 관심은 그런 상징적 사진이 없는 사건들로 향한다. 따라서 관계의 장에 두거나 세부를 살펴볼 대상으로서 핵심적 사진이 정작 작품 내에는 부재하게 된다. 왜 굳이 이런 조건을 두는가? 어떤 현실적 사건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진의 배제 또는 부재를 조건으로 해서만 출현할 수 있는 영화적 사건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그냥 출현할 리 없다. 여기서 홍진훤은 역사적 상징의 자리에 놓이지 못했던 온갖 이미지와 증언의 말들과 외침의 말들이 범람케 하고 일대 소란을 일으키며 사건의 강신술을 펼친다. 이는 관계를 만들고 세부를 탐색하는 분석적 몽타주와는 전연 다른 퍼포먼스적 몽타주다. 그리고 묻는다. 당신은 사건의 출현을 보았습니까?
하지만 그가 발견의 임무를 관객에게만 돌리는 무책임한 작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이 강신술에서는 크게 네 개의 사건적 계열이 교차한다. (복수의 계열을 교차하는 방식은 홍진훤의 장편 <멜팅 아이스크림>과 <오, 발렌타인>에서도 뚜렷하다.) 각각의 계열이 다루는 사건이 사진과 맺는 관계에 따라 우리는 상징적 사진이 존재하는 사건의 계열과 그런 사진이 존재하지 않는 사건의 계열로 크게 구분해 볼 수 있다.
미국 정부가 주도한 농업안정국(FSA)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도로시아 랭이 1936년에 촬영한 유명한 다큐멘터리 사진 <이민자 어머니>를 둘러싼 논란, 그리고 2002년에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했을 때 집회 현장에 다시 등장한 윤금이 씨의 시신 사진에 대한 논란은 전자의 계열에 속한다. 이 경우, 논란의 중심에 놓인 사진은 정작 화면에서 볼 수 없다. 물론, 질 J. 울망이 말했듯 이미지는 없앤다 해도 항상 무언가가 남는 법이다. 대신 우리는 FSA 사진가들이 촬영했으나 최종적으로 승인되지 않고 폐기되었던 숱한 ‘펀치 사진’들, 이 사진의 모델이 되었던 플로렌스 톰슨과의 인터뷰, 시신 사진의 전시를 둘러싼 실랑이를 기록한 비디오 영상 등을 접하게 된다. 상징적 사진에서 풀려나 얼마간 익명성을 띠게 된 이 자료들은 풍동에서 벌어진 재개발 반대 투쟁, 그리고 명동성당에서 벌어진 이주 노동자들의 투쟁과 관련된 기록 영상 등 후자의 계열을 이루는 자료들과 뒤섞이며 소용돌이친다.
그 소용돌이 가운데 무엇이 출현하는가? 내가 떠올리는 것 중 하나는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한 불확정적인 비디오 이미지다. 사운드트랙에서는 “이 녹음은 도로시아 랭과 뉴욕에서 진행된 1964년 5월 22일의 인터뷰입니다.”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때 화면에 보이는 것은 어느 가난한 집 부엌에서 민소매 셔츠를 입은 남자가 오른편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의 얼굴은 식별되지 않는다. 을씨년스러운 주방에 그나마 놓인 사물들의 ‘한국적’ 생김새로 봐선 여긴 뉴욕일 리 없고 인터뷰 현장도 아니다. 이 부분 바로 직전에 나왔던 세 장의 흑백사진 중 하나(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는 FSA 펀치 사진)에는 어느 오두막에서 식기를 닦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는데 이 비디오 이미지와 느슨하게 연결되는 것도 같다. 이것은 흑백사진들보다도 전에 나왔던, 명동성당에서 투쟁 중인 이주 노동자들을 찍은 비디오 이미지와 관련된 것일까? 그들 중 누군가의 집에서 찍은 것일까? 아니면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재개발 반대 투쟁의 현장 어딘가에서 기록된 것일까? 아니면 어떤 사건적 계열과도 무관한 것일까?
<언다큐먼티드 모나리자>를 아무리 거듭해서 보아도 이 불확정성은 조금도 해명되지 않았다. 그저 어린 시절의 내가 아침저녁으로 보았던 어떤 풍경과 무척 닮았다는 점만 어느 순간 깨달았을 뿐이다. 여기서 영화의 다른 부분은 물론이고 그 바깥으로 한없이 연결될 것만 같은 잠재적인 이미지 하나가 출현한다. 영화적 사건은 이처럼 흐릿하고 희박하기에 고도의 긴장 속에서만 파악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들리고 있던 드럼 소리는 이 사건의 출현을 예비하는 것이었나 보다.
글쓴이. 유운성
영화 평론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문지문화원 사이 기획부장으로 일했다. 2016년 영상 전문지 『오큘로』를 창간해 현재까지 공동 발행인을 맡고 있다. 저서로 『유령과 파수꾼들』(2018),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2021), 『식물성의 유혹』(2023), 『물듦』(2025)이 있고, 조너선 크레리의 『지각의 정지』(2023)를 번역했다. 2025년 제4회 정점식미술이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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